하루 몇 걸음 걸어야 건강에 좋을까

하루 몇 걸음 걸어야 건강에 좋을까

스마트워치가 "오늘도 만보 못 채웠네" 하고 알림을 띄울 때마다 살짝 죄책감 드신 적 있으신가요. 그 만보라는 숫자, 사실 과학이 정한 기준이 아니에요. 1960년대 일본의 한 시계 회사가 만보계를 팔려고 붙인 마케팅 카피에서 나왔습니다. 그럼 정말로 하루 몇 걸음이 필요한지, 최근 대규모 연구가 내놓은 숫자를 하나씩 짚어볼게요. 

1965년 야마사 만보계가 만든 만보

1965년 야마사 만보계가 만든 만보

1965년 일본의 야마사 도케이 게이키(Yamasa Tokei Keiki)가 세계 최초의 소비자용 만보계를 내놓습니다. 제품 이름이 '만보계(万歩計, Manpo-kei)', 그러니까 '만 걸음 재는 기계'였어요. 1964년 도쿄 올림픽 직후 일본에 건강/피트니스 붐이 불던 시기였고, 이 붐을 겨냥한 신제품이었습니다.

기획에 참여한 규슈 건강복지대학의 하타노 요시로 교수는 당시 일본인 평균 걸음 수가 하루 3,500~5,000보라며, 이걸 만보로 늘리면 관상동맥질환 위험이 낮아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이 '만'이라는 숫자를 뒷받침할 임상 근거가 없었다는 점이에요. 하버드 의대 역학자 아이민 리(I-Min Lee)는 "당시 만 보를 실제로 검증한 연구는 없었고, 숫자가 듣기 좋고 기억하기 쉬워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왜 하필 만이었을까요. 숫자가 라운드해서 기억하기 좋고, 일본어 만(万) 자가 '가득함/풍성함'을 뜻하며 걷는 사람 모양과도 닮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슬로건이 1990년대 후반 미국 피트니스 매체를 타고 서구권으로 퍼졌고, 어느새 전 세계 건강 상식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4400보부터 사망 위험 41% 감소

4400보부터 사망 위험 41% 감소

만 보라는 숫자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2019년이에요. 앞서 언급한 아이민 리 교수 팀이 JAMA Internal Medicine에 발표한 연구가 결정적이었습니다. 평균 나이 72세 여성 약 17,000명을 4년 넘게 추적한 대규모 관찰 연구였어요.

결과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루 4,400보만 걸어도 2,700보 걷는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41% 낮았어요. 걸음 수가 늘수록 위험은 계속 줄었지만, 7,500보 지점부터 이득이 정체됩니다. 7,500보 걷는 사람과 10,000보 걷는 사람의 사망률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만 보를 향해 헐떡이며 걸을 필요가 없다는 첫 대형 증거였습니다.

여기서 자주 오해하는 부분 하나. 4,400보가 '충분한 걸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앉아만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걷는 편이 사망 위험을 크게 낮춘다는 얘기예요. 시작 기준선이 낮을수록 초반 걸음의 이득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60세 이상은 6000~8000보에서 평탄화

60세 이상은 6000~8000보에서 평탄화

2022년 3월 The Lancet Public Health에 실린 메타분석이 이 그림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애머스트대 아만다 팔러치(Amanda Paluch) 교수가 이끄는 국제 공동 연구팀이 아시아/호주/유럽/북미의 코호트 15개를 통합해 성인 47,471명, 사망 사례 3,013건을 분석했어요.

핵심 발견은 나이대별로 최적 구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60세 이상 성인이라면 하루 6,000~8,000걸음에서 전체 사망 위험 감소가 평탄화됐어요. 다시 말해 8,000보를 넘겨 아무리 더 걸어도 사망률 측면에서는 추가 이득이 통계적으로 잡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체 수치로 보면, 걸음 수 최하위 4분위(중앙값 3,553보)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최상위 4분위(중앙값 10,901보)의 사망 위험비(HR)는 0.47이었어요. 40~53% 낮았다는 얘기입니다. 60세 이상은 관절 부담이나 낙상 위험이 젊은 층보다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리해서 만 보를 채우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실용적 함의를 지닌 결과예요.

60세 미만은 8000~10000보 구간

2000~8000보에서 감소폭 가장 커

같은 연구에서 60세 미만 성인은 결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 연령대는 하루 8,000~10,000걸음까지 걸어야 사망 위험 감소가 평탄화됐어요. 즉 만 보라는 오래된 기준이 젊은 성인에게는 완전히 틀린 숫자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만 보가 마법의 숫자는 아니에요. 8,000보와 10,000보 사이의 이득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연구팀이 걷기 속도(cadence)를 별도로 살펴본 결과, 전체 걸음 수를 채우고 나면 속도로 얻는 추가 이득은 뚜렷하지 않았다고 보고했어요. 총량이 속도보다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연령대이득 평탄화 구간비고
60세 이상6,000~8,000보8,000보 초과 시 추가 이득 미미
60세 미만8,000~10,000보10,000보 초과 시 추가 이득 미미

참고로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신체활동 가이드라인에서 주당 중강도 유산소 150분(또는 고강도 75분)을 권고하지만, 걸음 수로 공식 환산하지는 않아요. 학계에서 이 기준을 노인 걸음으로 환산하면 대략 하루 8,600보 수준이라는 계산이 있습니다. 팔러치 팀의 60세 이상 평탄 구간과 큰 틀에서 맞아떨어지는 값이에요.

2000~8000보에서 감소폭 가장 커

가장 중요한 실용 포인트는 여기입니다. 사망 위험이 가장 가파르게 떨어지는 구간이 2,000~8,000보 사이라는 점이에요. 걸음 수가 낮을 때 조금만 늘려도 이득이 크고, 이미 많이 걷는 사람은 더 늘려도 곡선이 완만해집니다.

팔러치 팀의 데이터를 세분하면 이렇습니다. 하루 3,000보에서 6,000보로 늘리면 사망 위험이 약 50% 감소, 6,000보에서 8,000보로 늘리면 추가 26% 감소, 8,000보에서 10,000보로 늘리면 추가 13% 감소예요. 뒤로 갈수록 이득의 기울기가 확연히 작아집니다. 적게 걷던 사람이 조금 늘리는 편이 많이 걷는 사람이 더 늘리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라는 얘기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 보는 1965년 일본 만보계 광고 카피였고 과학적 기준이 아니었어요. 대신 나이대에 따라 60세 이상은 6,000~8,000보, 60세 미만은 8,000~10,000보를 목표로 잡되, 지금 하루 3,000보 안팎을 걷고 있다면 6,000보만 채워도 이득의 절반을 챙길 수 있습니다. 스마트워치가 만 보 미달을 알린다고 자책하기보다, 어제보다 2,000보만 더 걷는 편이 훨씬 실용적인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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