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다 갑자기 며칠 전 들은 후렴구가 머릿속에서 재생될 때가 있다. 라디오도 스피커도 없는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뇌과학자들은 이 현상에 '비자발적 음악 심상(Involuntary Musical Imagery, INMI)'이라는 정식 이름을 붙여두었다. 자료를 정리해보니 이 짧은 재생 하나에 청각 피질, 음운 루프, 미완성 효과, 수면의 질까지 얽혀 있다.
귀벌레 현상, 성인 90%가 겪는다
귀벌레(earworm)는 독일어 Ohrwurm을 그대로 옮긴 표현이다. 학술 용어로는 INMI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멜로디의 짧은 조각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상태다.
이 현상을 처음 실험 데이터로 붙잡은 사람은 2000년 미국 신시내티대학교 마케팅 교수 James Kellaris다. 그는 이 반복을 '인지적 가려움(cognitive itch)'이라 표현했고, 후속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98%가 최소 한 번은 겪었다고 답했다.
핀란드 알토 대학의 Lassi Liikkanen이 2012년 발표한 대규모 조사에서는 숫자가 더 구체적이다. 인터넷 이용자 12,519명을 조사했더니 89.2%가 최소 주 1회 귀벌레를 경험했고, 약 33%는 거의 매일 겪는다고 답했다. 특이한 체질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뇌가 음악을 처리하는 기본 방식에 가깝다.
청각 피질과 음운 루프가 만드는 반복 재생
귀벌레가 재생되는 순간 뇌를 촬영하면 실제로 노래를 들을 때와 거의 같은 영역이 켜진다. 측두엽의 청각 피질이다. 소리 자극이 없는데도 청각 피질이 활성화되니 '들리는 것 같은' 착청 감각이 생긴다.
여기에 작업기억의 하위 시스템인 '음운 루프(phonological loop)'가 얹힌다. 음운 루프는 짧은 소리 정보를 잠깐 붙잡아두는 스크래치패드 같은 회로다. 소리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조음 리허설(articulatory rehearsal)로 계속 새로 고쳐주는데, 이 되새김 회로가 특정 멜로디 조각에 물리면 재생이 반복된다.
Durham 대학의 Kelly Jakubowski가 2015년 Consciousness and Cognition에 실은 논문은 이 반복이 뇌 구조와도 상관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귀벌레를 자주 겪는 사람일수록 우측 전두/측두 피질, 전방 대상피질, 좌측 각이랑의 회백질 두께가 특정 방향으로 달랐다. 지각/감정/기억/자발적 사고를 담당하는 네트워크가 통째로 동원된다는 얘기다.
미완의 멜로디를 붙잡는 자이가르닉 효과
1927년 소련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이 카페에서 한 장면을 관찰했다. 웨이터들이 결제가 끝난 주문은 금방 잊는데, 아직 결제되지 않은 주문은 세부 사항까지 정확히 기억했다. 실험실에서 재현해봐도 미완성 과제의 회상률이 완료 과제보다 뚜렷하게 높았다.
이 원리를 노래에 적용하면 귀벌레가 왜 후렴구에서 자주 걸리는지 설명된다. 뇌는 멜로디를 하나의 완결된 형식으로 인지하는데, 어중간하게 끊긴 조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일'로 처리되어 작업기억이 계속 매달린다. 마지막 소절까지 다 부르면 오히려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서 귀벌레를 지우는 방법으로 '그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하기'가 종종 효과를 본다는 보고가 있다. 뇌 입장에서는 미완의 상태가 해소되는 셈이다. 다만 만능은 아니다. 최근 며칠 사이 노출량이 지나치게 쌓였다면 완창 뒤에도 다시 걸리곤 한다.
120~140 BPM, 귀벌레가 되는 노래 조건
Jakubowski 팀은 2016년 미국심리학회(APA) 저널에 귀벌레가 되는 노래의 음악적 조건을 정리한 논문을 실었다. 대규모 설문과 실제 히트곡 데이터를 대조해보니 공통 특징이 몇 가지로 압축됐다.
| 특징 | 내용 |
|---|---|
| 템포 | 120~140 BPM (댄스곡/팝 후렴 대역) |
| 조성 | 장조(major key) 위주 |
| 멜로디 윤곽 | 단순/반복, 예상 밖 도약 한두 번 |
| 음정 간격 | 대부분 좁고, 가끔 튀는 넓은 도약 |
| 노트 길이 | 상대적으로 긴 노트가 섞임 |
중요한 조건은 '변주가 있는 반복(repetition with variation)'이다. 완전히 똑같이 반복만 되면 뇌가 곧 예측해버려 흥미를 잃는다. 반대로 완전히 새로우면 붙잡지 못한다. 익숙한 패턴 안에 살짝 어긋난 지점이 있어야 뇌가 그 자리에 걸린다.
가사가 있는 곡이 기악곡보다 귀벌레가 되기 쉬운 이유도 여기 있다. 음운 루프는 원래 언어 처리에 특화된 회로여서 가사 붙은 멜로디를 더 오래 붙잡는다. Liikkanen 조사에서도 응답자 다수가 가사 있는 대중가요를 귀벌레로 지목했고, 여성이 남성보다 에피소드를 더 자주 보고했다.
멍 때릴 때 귀벌레가 자주 찾아오는 이유
샤워, 산책, 설거지, 지하철에서 창밖을 보는 순간. 유독 이런 때 귀벌레가 자주 찾아오는 데는 뇌 회로 차원의 이유가 있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회로가 켜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DMN은 특정 과제에 집중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회로다. 이때 작업기억이 텅 비면 음운 루프가 빈자리를 메우려고 최근 저장된 소리 조각을 꺼낸다. 며칠 전 들었던 후렴구가 무대에 오르는 셈이다.
수면 부족과의 연결도 최근 밝혀지고 있다. 미국 Baylor 대학의 수면 연구에서는 잠자리에서 주 1회 이상 귀벌레를 경험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수면 질이 나쁠 확률이 약 6배 높았다. 잠들기 직전은 인지 통제가 느슨해지는 구간이라 반복 재생이 더 쉽게 시작되고, 그 재생이 다시 각성 상태를 유지시켜 잠을 방해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귀벌레는 결함이 아니라 뇌가 소리/언어/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이 만든 부산물에 가깝다. 오래 붙잡히고 싶지 않다면 다른 언어 과제로 음운 루프를 채우거나 - 짧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거나 다른 노래를 완창해보거나 - 아예 그 노래를 끝까지 불러 뇌에 종결감을 주는 편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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